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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달 참 예쁘네요.
이 름 : 다산북스   작성일 : 2016-09-21    
 


 

자정에서 몇 분 모자란 시각에 후배가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달이 떠 물비늘이 바다를 간지럽히는 사진이었다. 여수 밤바다다.

말본새나 끼적인 글을 보면 이녀석이 남자이지 싶은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천상 여자인 후배다. 나나 후배나 자신에게 첫 직장이었던 곳에서 만난 인연이다. 많이 울렸고 지청구도 많이 주었다. 함께한 시간은 3년이나 될까 싶고, 한날 한시 나란히 퇴사하여 얼굴 못본지는 벌써 4년이 넘었다. 서로 애아빠 애엄마에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지만, 가끔씩 취기를 빙자하여 전화해서는 '보고싶다'거나 '그립다'라는 말을 날리는 사이다. 만취하여도 손전화 주소록 뒤적이며 닥치는대로 전화를 걸어대는 궁상맞은 주사는 없지만, 희한하게도 후배에게는 그리된다.

후배는 여수 밤바다에 뜬 달을 보니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을 찾아 함께 강진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했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 후배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아재인 나로서는 생경한 음악을 같이 들었었다. 여수 밤바다와 강진의 밤바다를 비교해보니 둘이 쌍둥이인 듯 닮았다. 하긴, 여수의 달이나 강진의 달이나 달은 하나이고 바다도 하나이니 무엇이 다르겠느냐 싶은데, 달라진 걸 떠올려보니 구박할 후배가 옆에 없다. 돌이켜보면 많이 모자란 후배였지만 깨물었을 때 가장 아픈 후배였다. 그저 살갗이 조금 까진 정도여도,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질 그런 후배였다.

 

 벌써 5년 전, 강진의 밤바다 

 

강진에서 강에 배 띄워놓고 꿈틀거리는 낙지에 소주를 들이부었던 기억이 바로 어제같다. 사진 아래 예전에 달아둔 글을 보니 이렇다.

달빛이 수면에 비치지 않았다면, 하늘과 물의 경계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구름이 많았겠으나 어둠이 삼켜버려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저 달 주변의 구름이 달빛에 드러날 뿐이다. 동그란 술잔에 동그란 달. 하늘도 물도 먹빛이니, 그대로 찍어 시를 적어도 되겠다. 먹으로 알아 시를 적어도 결국은 물빛 하늘빛이라 적고 나서 곧 증발하고 사라질 터이니, 적어내린 글씨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먹빛의 물과 하늘을 진하게 찍어 연서(戀書)한 통 적어내려가면 어떨까 싶었다. 보냈으나 보내지 않은 그런 편지 말이다. 

아, 내가 이런 글을 썼구나 싶다. 문득 먹빛의 물을 붓에 담뿍 찍어 후배에게 편지 한통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생각해보니 바쁘다. 편지 한 장 띄우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바쁘다. 바쁘다면서도 술은 잘도 처먹는다.
 

 

강진에서 물에 배 띄우고, 회에 소주를 먹으며 노래도 불렀었지

 

가끔 후배에게 책을 보낸다. 후배는 들으면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독서가이자 애서가이다. 나는 출판사에서 종이밥을 먹으면서, 겨우 밥을 굶지 않을 정도로 책을 읽는 편이다. 반면 후배는 밥그릇에 쌀이 아닌 책을 담아 먹지 싶을 정도의 독서가이다.

못된 선배는 다산북스에서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노라고, 책 뒤쪽 판권에 박힌 선배 이름 들여다 보라고 종종 책을 보낸다. 내가 못가고 얼굴을 썰어서 내려보낼 수 없으니 낯 대신 이름이라도 보라고 책을 보낸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보내서 창피하지 않을 책들만 보낸다. 좋은 책이거나 재밌는 책만 보낸다. 선배는 꿋꿋하게 좋은 책을 만들며 살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전쟁이 났는지도 모르고 태평히 보낼 정도로 깊은 산골에 살던 촌부가 서울 나들이간다고 양장점에서 양복 한 벌 맞추고 어깨에 뽕 집어넣듯, 그런 뽕을 빌려다가 책에 함께 넣는다.

 옜다, 뽕 받아라. 옜다, 선배가 주는 책이다. 선배는 이런 책 만들며, 팔며, 이렇게 밥 빌어먹고 살고 있다. 나의 못난 낯짝 대신 책이라도 봐라. 서로 보고프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여수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는 선배의 변명 하나 받아두거라, 옜다.

 뉴욕에 사는 만화가라는데, 파주 사는 내가 보니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뉴요커라고 금똥 쌀 줄 알았더니만 만화를 보니 대륙과 대양을 건너 성별의 차이를 넘어서 공감되는 게 많다. 4컷에서 5컷 정도의 짧은 만화 속에 공감이 담겨있다. 가장 좋은 위로나 격려는 다른 게 없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동질감에서 위로는 시작된다. '여자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읽어봐도 좋겠다. 아마 절반도 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니까. 어째 난 소도둑처럼 생긴 사내놈인데 이리 술술 이해되고 공감되나 신기했다. 심지어 가장 격하게 공감하고 탄복했던 건 여성의 '생리'를 표현한 네 컷이었다. 나는 변태가 아니고 독자다. 여성의 불편함을 이렇게 명쾌하고 심플하게 표현한 걸 본 적이 없다. 꽁냥꽁냥한 감정의 디테일은 마스다 미리 등의 일본 만화가 으뜸이었는데, 뉴욕 사는 이여자는 시니컬하고 털털한 디테일로 다가온다. 웃긴 여자다.

​며칠 전 함께 일했던 또다른 후배 심씨와 술을 먹다가, 집 근처 개천가에 남자 둘이 앉아 편의점에서 사온 캔맥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는데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가고 팔을 힘차게 휘젓는 아주머니들이 지나간다. 졸졸졸 물소리 들으며 술을 퍼먹다가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가 이런다. "술 마셨다면서 차장님 목소리 멀쩡하네요? 왜 심씨만 취했대요?" "아니야, 나도 취했어."

[어른이 되기는 글렀어]에 딸려오는 스티커다. '출근도 안 했는데 격하게 퇴근하고 싶다'라니.​ 

어차피 어른이 되기는 영 글러버렸다. 어른이 되는 건 다음 생으로 미루기로 한다. 팔십 먹은 할아버지가 돼도, 여전히 어렸던 후배를 떠올리며 그날의 바다와 그날의 달을 얘기할 게 분명하다. 얘기할 게 참 많다. 추억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좋은 추억을 나눌 이가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 어른이 되기는 틀려버렸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좋고 그녀도 좋다.

 

 

 

 

 최근에 후배에게 보낸 책이다. 제목이 참 내 마음같다. [어른이 되기는 글렀어]라니, 참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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